새해를 맞아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연말이 되면, 목표를 달성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다시 계획을 세우고, 또 실망한다. 이럴 때 봐야 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1994, 파라마운트 픽쳐스)
1.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예요.)
영화가 시작하며 벤치에 앉은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가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옆에 앉은 낯선 이에게 초콜릿을 권하며 하는 말이다. 포레스트의 엄마가 포레스트에게 해주었던 말인데, <포레스트 검프>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인생살이를 간단하고 재미있게 비유한 이 말은 영화 전체에 흐르는 메시지와도 일맥상통한다.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어떤 초콜릿을 먹게 될지 모르거든요)
포레스트는 사회에서 규정한 '지능'이 낮은 아이였지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초인적인 기억력과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은 압도적이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은, 벤치 옆자리 사람에게) 하나하나 풀어내는 그의 서사는 수많은 세부점들을 포함하며 흥미를 자극한다.
그가 풀어낸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위 문장들이다. 그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자신의 인생을 '백만개도 넘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삶이 그 자체로 선물이었다. 초콜릿의 다양한 모양과 맛 그리고 향기가 초콜릿 상자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듯이, 그가 겪은 다양한 삶의 자취는 모두 아름다운 선물을 즐긴 행복한 기억들이었다.
신년 계획을 세울때는 보통 '자기 계발', '목표 달성', '수익 실현', '경제적 자유', '부자 되기'와 같은 단어들의 언저리에서 머물게 된다. 물론 중요한 목표들이고 필요한 것들이다. 하지만 돈을 벌고 누리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기에,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초콜릿' 중에 다른 모양과 맛을 가진 것은 없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온 가족 여행', '엄마랑 단둘이 여행 가기', '아빠랑 단둘이 소주 마시기', '친척 찾아뵙기', '소중한 사람에게 손 편지 쓰기', '옛 사진 보며 추억 공유하기'와 같은 시시콜콜하고 사소한 단어들이 추가되기에, 우리가 가진 '초콜릿 상자'에는 아직 많은 공간이 있다.
2. I do remember the first time I heard the sweetest voice in the wide world.
(세상에서 제일 고운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때는 정확히 기억나요)
포레스트의 영원한 사랑이자 유일한 친구였던 '제니'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그가 하는 말이다. 포레스트는 자신이 태어났을 때 혹은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첫 소풍 따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니와의 첫 만남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다리가 불편한 데다가 보통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제니는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친구가 되어준다.
시간이 흘러 각자의 인생이 너무도 달라졌을 때에도, 포레스트는 변함없이 제니의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가 밤무대 가수를 하든, 마약에 취해 사는 집시 생활을 하든 포레스트는 제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언제나 지지해준다. 아동 성학대를 당했던 제니의 불행한 인생의 시작에서 포레스트를 만난 건, 그래서 제니에게 더 큰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제니가 포레스트의 아이를 낳고 셋이서 함께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 너무도 짧았던 것은 그래서 비극이자, 한편으로는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소중하고 가치있다고 느끼는 것은 다를 테지만, 진짜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깨달은 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평생을 방황하며 살았던 제니가 결국은 가장 소중한 친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뜬금 없어보일지라도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소중한 것을 위해서. 새해가 시작되는 지금, 나의 뜬금없는 고백 한마디, 선물 하나, 안부 인사 한 줄, 전화 한 통이 평소보다 훨씬 더 너그러이 받아들여질 때이다. 어린 제니가 통학 버스에서 포레스트에게 건넨 따듯한 한 마디가 사실 제니 인생에서 본인에게 더 큰 위로를 준 관계의 시작이 되었던 것처럼, 지금 나의 작은 용기 하나가 결국 나에게 소중한 인연을 만들고, 시작하고, 지킬 수 있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3. A promise is a promise.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포레스트는 부대를 이끌던 댄 중위를 만나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베트남에서 죽은 친구 '버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우잡이 배를 사서 운영하겠다는 포레스트의 말에 댄 중위는 콧방귀를 뀐다. 두 다리를 잃은 댄 중위가 삶에 의욕이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해본 적도 없는 새우잡이 배를 끌겠다는 포레스트의 계획이 현실성 없어 보이기도 했다.
I tell you what, Gilligan, the day that you are a shrimp boat captain, I will come and be your first mate.
잘 들어 이 바보야, 네가 새우잡이 배 선장이 되면 내가 가서 일등 항해사를 해줄게!
포레스트는 군대에서 익힌 탁구 덕분에 찍은 CF로 정산받은 돈을 털어 버바의 고향인 앨라배마에 가서 새우잡이 배를 정말로 산다. '약속은 약속이니까'라는 이유로 벌이기에는 너무도 엉뚱한 일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진짜 '바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포레스트의 새우잡이 배 '제니 호'는 늘 쓰레기나 건져 올릴 뿐, 제대로 된 조과를 내지 못한다.
말은 심하게 뱉어놓았지만 댄 중위는 포레스트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 혼자서 새우 잡이 그물과 씨름하던 포레스트는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폭풍 때문에 인근 새우잡이 배들이 모두 부서지고, 홀로 남은 '제니 호'는 매번 만선으로 회항한다. 그렇게 유명한 '버바 검프 새우' 회사가 시작되어 포레스트와 댄 중위는 중견 회사를 이끄는 사람들이 되었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포레스트의 '꾸준함'이 가진 힘이 너무도 크다. 그는 어려서 달리기를 할 때도, 전장을 누비면서도, 탁구를 치면서도, 새우잡이를 하면서도, 제니가 잠시 떠난 뒤에 전국을 달릴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했고 꾸준히 지속했다. '바쁘다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적응력', '순발력', '임기응변'과 같은 특성이 더 중요해 보이지만, 결국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성 중 하나는 '꾸준함'이다. 그리고 그 '꾸준함'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약속'이다. 나에게 한 약속, 남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약속 자체가 나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가진 신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포레스트가 앞만 보고 달렸던 것은, 주변의 작은 이익과 유혹이 아닌, 더 중요한 '신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었고, 그 '신뢰'는 결과적으로 그에게 다양한 의미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대단한 계획과 거창한 목표보다는, 작은 신뢰를 쌓아가는 약속을 지키는 일. 어쩌면 소소한 행위적 목표보다 근본적인 인생 목표를 생각해보게 하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4. I didn't know it, but I was destined to be your momma. I did the best I could.
(몰랐었지만, 나는 너의 엄마가 될 운명이었지. 그리고 난 최선을 다했단다.)
포레스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 자칫 '바보'로 취급받으며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한정된 역할만 수행하며 살았을지 모를 그를, '삶은 초콜릿 상자'라고 여기며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 그의 어머니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침대 곁에 앉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한다.
'난 최선을 다했단다.'
어머니도, 포레스트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홀로 아들을 키우는 억척스러운 엄마의 역할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운명을 받아들였고, 감히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다'라는 것을 전제로, 포레스트가 스스로를 '저능아'이거나 '바보'라고 여기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교육한 그녀의 철학은, 좋은 부모란 단지 좋은 옷을 사 입히고 소고기를 사 먹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음을 잘 드러내준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그에 걸맞은 최선의 노력을 다한 포레스트의 어머니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어머니이자 '어른'이었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모습은 평안해 보인다. 후회가 없음은 물론이고, 아쉬움도 없어 보인다. 죽음조차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죽음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보낼 수 있음에, 훌륭하게 성장한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여유는 그녀가 진정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어쩌면 거창한 신년 계획과 목표는 따로 필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지금 하고 있는 나의 일이, 내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오늘 내가 속해 있는 공간과 상황이 목표가 될 수 있겠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하루가 목표이자 계획이 되는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준다고 불평만 했던 회사에서, 별로 새로울 것도 신나는 것도 없어 보이는 집에서, 늘 얼굴을 맞대고 사는 가족들과,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일터의 사람들과, 내가 먼저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 목표가 될 수 있겠다.
5. He says I can't read it. I'm not supposed to, so I'll just leave it here for you.
(아들이 나는 읽지 말래. 난 읽으면 안 되니까, 당신만 보게 여기 편지를 둘게)
개인적으로 가장 눈물이 났던 장면이다. 제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랑스러운 아들 '포레스트 주니어'. 병으로 죽은 제니에게 아들이 쓴 편지를 들고 무덤을 찾은 아빠 포레스트. 똑똑한 아들과의 일상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다가 조심스레 아들의 편지를 꺼내며 포레스트가 하는 말이다. 아들이 읽지 말라고 해서, 제니에게 쓴 편지이니까, 포레스트는 아들의 편지를 정말 읽지 않고 묘비 위에 고이 올려만 놓는다. 아버지가 아들의 생각을 읽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차피 제니가 그 편지를 읽지도 못하니 대신 낭독해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레스트는 아들의 바람대로 편지를 두고 돌아왔다.
순수하게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포레스트의 태도에 편견과 이해타산적 셈법은 없다. '속지 않기 위해서', '당하고만 살지 않으려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만나며 살아가는 우리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 나를 먼저 순수하게 좋아해 주기를 바란다. 나를 온전히 신뢰해주는 내 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할 생각은 잘하지 못하면서. 활짝 열어버린 마음에 또 하나 상처받을까 두려워 움츠러든 채로.
하지만 순수하게 사람을 만나고 좋아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포레스트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행했다. 때로는 바보 취급을 받고, 속아서 골탕을 먹기도 했지만, 그런 일이 있어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바보'여서 그랬을까? 아니다. 포레스트는 제니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깊이 염려했고, 함께 하고 싶어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었다. 다만, 제니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전제 하에서만 그렇게 했다. 제니가 떠날 때 마음 아팠지만 받아들였고, 제니가 돌아올 때 환하게 두 팔 벌려 맞이해 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적당한 거리와 한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성숙한 자세가 순수한 사랑의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어린 아들에게까지 그 존중심을 갖고 대하는 '바보' 포레스트의 모습은, 사람들로 인해 스트레스받고 고통스러워하는 '보통' 사람들과 대비된다.
새해에는 남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를 변화시킬 수 없으면, 받아들이는 내가 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때로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간계에 속아주는 여유도 가져보자. 내가 '바보'여서가 아니라, 들통이 날 거짓말을 뻔뻔하게 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해서 살림살이 좀 나아졌니? 파이팅!'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자. 나의 삶의 원칙들을 깨지 않는 이상, 내가 정한 선을 넘어오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있고 싶어 하는 자리에 있도록 냅 두어 보자. 내가 그를 순수하게 타인으로 여기고 살고 있음이 느껴질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가 느낄수록, 관계는 알아서 정립되어 갈 것이다. 포레스트를 괴롭히거나 무시했던 사람들은, 그 좋은 그의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지도 않았다.
'그런가 보다.'
<포레스트 검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꼭 어울리는 대사. 새해에는 가까운 사람에게나 멀리하고 싶은 사람에게나 '그런가 보다'하고 받아 넘겨줄 수 있는 여유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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